제주 올레 13코스
오롯이 걷는 하루
아빠와 세쌍둥이, 용수에서 저지까지
제주 올레길 이틀째 아침이 밝았다. 어제의 피로가 채 가시기도 전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이들은 눈이 반쯤 감긴 채로도 올레 여권을 꼭 쥐고 있었다. 아빠를 닮아서인지, 일단 시작한 건 끝을 봐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도전할 코스는 제주 올레 13코스 — 용수포구에서 시작해 저지예술정보화마을 미센터까지 내륙을 가로지르는 길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제주의 5월 햇살이 어깨를 툭 치는 느낌이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기운을 빼는 그런 볕. 나는 넓은 챙 모자와 마스크로 무장했고, 아이들은 반팔과 가벼운 후드로 가볍게 나섰다. 여권을 들고 서로 사진을 찍으며 킬킬거리는 모습에 지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자, 출발이다.
용수저수지에서 — 푸른 수면 위로 철새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 제주 내륙 최대의 농업용 저수지 중 하나로, 철새 도래지로도 유명하다
- 잔잔한 수면 위 섬처럼 솟은 갈대밭이 13코스의 첫 풍경을 장식한다
- 봄철에는 다양한 텃새와 철새가 관찰되는 탐조 명소
- 올레길 13코스 안내 표지판이 잘 갖춰져 있어 방향 찾기 어렵지 않음
저수지 앞에 섰을 때, 솔직히 가슴이 조금 설렜다. 쭉 뻗은 수면 너머로 보이는 제주의 들판, 그 위로 낮게 드리운 하늘. 도시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걸어서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차원이 다르다. 아이들도 잠깐은 말을 잊고 저수지를 바라봤다. 그 잠깐이 나에게는 꽤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저수지를 지나자 길은 농로와 숲길로 이어졌다. 올레 13코스는 바다 코스와 달리 내륙 깊숙이 들어가는 길이다. 논길, 밭길, 그리고 소나무 숲. 제주 해안의 드라마틱한 절경 대신 소소하고 조용한 제주의 속살을 보여주는 코스라 할 수 있다. 처음엔 아이들이 "바다는 언제 나와요?" 하고 물었다. 이 코스엔 바다가 없다고 했더니 아들이 "그럼 뭐 보러 가요?" 하며 시큰둥해했다.
용수리 619-2 근처 · "모든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 올레길 시 표지판
걷다 보면 길가에 올레만의 붉은 시 표지판이 서 있다. 그냥 지나치려다 발걸음이 멈췄다.
"모든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다 / 수많은 갈림길에서 / 어떤 곳으로 향할 것인지 / 힘들어도 버텨낼 것인지 / 그냥 다 놓아버릴 것인지"
초등 6학년 아이들한테 이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나현이가 조용히 읽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그 표정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조수리 2266-1 근처 ·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 백창우
올레길이 이렇게 곳곳에 시 표지판을 세워둔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지루해서 발길이 무거울 때, 문득 눈에 들어오는 한 줄의 시가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오늘 이 두 편의 시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전 걷기가 끝나갈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허기가 밀려왔다. 아침을 먹지 못한 채 출발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대화도 줄어들었다. 더구나 중간에 공사 구간이 나타나면서 예정에 없던 우회로를 따라 걷게 되었다. 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PM 1:00, 조수리 일대 — 지치기 시작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올레 13코스는 솔직히 말하면 '인스타용' 코스는 아니다. 화려한 절경보다는 제주 농촌의 일상, 묵묵한 돌담, 소나무 그늘이 전부인 길이다. 처음엔 그 평범함에 살짝 실망했다. 하지만 걷다 보면 알게 된다 — 이 길이 주는 선물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별다른 볼거리가 없으니 오히려 발 아래 흙과, 바람 소리와, 옆에서 걷는 아이들의 숨소리가 더 잘 들린다.
낙천리 1678 · PM 1:12 — 낙천리사무소에서 중간 스탬프 도장!
- 올레 13코스의 중간 스탬프 지점으로, 올레 여권에 도장을 날릴 수 있다
- 여기서 종점까지 약 7km 정도 남은 지점. 체력을 점검하기 좋은 분기점
- 주변에 소규모 가게와 편의 시설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 적합
- 이 지점에서 코스를 이탈해 주변 맛집으로 향하는 선택도 가능
낙천리사무소에서 도장을 찍고 나서 바로 결단을 내렸다. 종점까지 가기엔 체력도, 배도 한계였다. 지도를 열어보니 근처에 지역에서 꽤 유명하다는 한식 뷔페가 있었다. 검색해보니 리뷰 수도 많고 평점도 좋고 가성비도 훌륭하다는 평이 많았다. 아이들한테 "한식 뷔페 어때?" 하니까 아들이 눈을 번쩍 뜨며 "빨리 가요!" 했다.
웅금로 일대 · PM 1:39 — 식당을 향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을 향해 걸으며 다시 검색을 해봤다. 그런데 아차 — 이 식당은 오후 2시까지만 영업한다는 안내가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50분.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뛰어야 할까?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식당을 찾아야 할까? 아이들 표정을 봤다.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다시 돌아가서 다른 식당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차 안내를 하시는 분께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지금 식사 가능한가요?"
"들어오세요, 됩니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한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며 식당 문을 밀고 들어섰다. 살았다!
PM 1:53 · 한양동식당 뷔페 — 허기진 배를 채운 든든한 한 상
웅금로 501 · 한양동식당 — 식사 후 배부른 얼굴로 한 컷
- 주소: 제주시 웅금로 501 일대
- 영업시간: 오전 10:30 ~ 오후 2:00 (라스트 오더 확인 필수!)
- 제주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가성비 한식 뷔페. 자리 회전이 빠르고 음식 종류 다양
- 올레길 13코스 낙천리 스탬프 지점에서 도보 약 20~30분 거리
- 주말 점심 시간대는 인근 주민과 관광객으로 매우 붐빔 — 일찍 방문 권장
- 별도 주차 공간 없이 도로변 주차 — 차량 안내 도우미 상시 배치
각자 먹고 싶은 걸 접시에 담아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말 없이 묵묵히 먹었다. 보통은 이것저것 수다를 떠느라 식사 시간이 길어지는데, 오늘은 정말 진지하게, 집중해서 먹었다. 올레길이 이런 효과도 있구나 싶었다. 배가 차오르자 아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근데 오늘 생각보다 힘들진 않았어요." 그 말이 제일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걸었다. 식사 후라 오히려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남은 구간을 걸어 드디어 저지리 미센터에 도착했다. 종점 스탬프를 찍는 순간, 아이들이 여권을 들어 올리며 서로를 바라봤다. 말은 없었지만 그 눈빛에 뭔가 있었다. '우리 해냈다'는 그것.
PM 3:07 · 저지리 미센터 — 올레 13코스 완주! 올레 여권 번호 13번 도장 인증
- 정식 명칭: 저지예술정보화마을 미센터 (제주시 저지리 1624-1)
- 올레 여권 스탬프 보관함이 입구에 비치되어 있어 자유롭게 날인 가능
- 저지예술마을 자체가 예술인 마을로,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가 산재
- 주변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제주시내 방면 버스 이용 가능
13코스는 솔직히 화려하지 않다. 바다도 없고, 극적인 오름도 없고, 한라산 풍경도 아니다. 하지만 걷고 나면 남는 게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길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는 역설. 논둑 사이를 지나며 나누는 조용한 대화, 지루하다고 툴툴대다가도 결국 끝까지 걷고 마는 아이들의 끈기. 아빠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 환승 정류장에 다이소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 하고 내렸다.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따라 들어왔다. 목적은 샤워기 필터. 며칠을 머물 호텔이니 혹시 모를 물의 불순물을 한 번이라도 걸러주고 싶었다. 아이들 피부에 좋지 않을까 봐. 5,000원짜리 비타민C 사워기 필터를 발견하고 바로 집어 들었다. 가성비 끝판왕.
노형동 710-3 · PM 4:57~5:01 — 5,000원짜리 비타민C 사워기 필터 호텔 설치 완료
호텔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분리하고 필터를 장착했다.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봤다. "아빠, 이거 효과 있어요?" 물어봐서 "100% 확신은 못 하지만 있는 것보다는 낫잖아" 했더니 납득했다. 여행지 호텔에서 이런 소소한 준비까지 챙기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면 역할이겠다. 큰 선물은 못 줘도 작은 불편함은 덜어주고 싶은 마음.
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오늘 올레길도 걷고, 배고픔도 버티고, 더위도 버텼으니 저녁만큼은 아이들이 진짜 좋아하는 걸 먹이고 싶었다. 세쌍둥이 셋이 공통으로 열광하는 음식 하나 — 회전식 마라탕. 주변에서 찾아보니 노연로에 회전 컨베이어벨트 방식의 마라탕집이 있었다.
PM 6:16 · 노연로 55 — 끝없이 돌아오는 재료들, 골라먹는 재미가 쏠쏠했던 회전식 마라탕
PM 6:18 · 노연로 55 —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 식사, 오늘 고생한 우리 가족 🌶️
- 위치: 제주시 노연로 55 일대
- 컨베이어벨트로 재료가 돌아오는 방식 — 원하는 재료를 골라 직접 탕에 넣어 먹는 형식
- 소고기 · 양고기 · 돼지고기 등 육류와 다양한 채소, 면류 선택 가능
- 마라 레벨 조절 가능 — 아이들과 함께라면 중간 강도 추천
- 저녁 시간대 현지인과 관광객이 몰리는 편 — 웨이팅 발생 가능
컨베이어에서 재료를 고르는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올레길 걸을 때의 지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어떤 걸 먹을지 진지하게 고르는 데 집중했다. 양고기, 소고기, 청경채, 두부… 각자 취향대로 넣고 끓이기 시작하자 금세 마라 향이 테이블을 감쌌다. 국물 한 숟갈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으면서 아들이 불쑥 말했다. "내일도 올레길 가요?" 거부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도리어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그냥 웃었다. 내일 또 걸으면 된다. 오늘처럼.
올레 13코스는 분명 쉬운 길이 아니었다. 아침을 굶고 출발해서, 공사 우회로에 허기짐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길 위에서 만난 시 한 편,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뷔페 식당, 그리고 무사히 찍은 종점 스탬프 — 이 모든 게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아이들은 오늘 걸음으로 뭔가를 배웠을 것이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계속 걸으면 결국 닿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끝엔 따뜻한 밥 한 그릇이 있다는 것을.
내일은 또 다른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다리는 뻐근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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